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문단 편집) === 국경에서의 충돌 === 1287년 12월 18일, 토곤과 아이우루이치는 군을 몰아 떠민(思明)에 집결했다가 12월 25일 마침내 다이 비엣의 국경으로 진입했다. 나흘 뒤인 29일에 록처우(鹿州)에 도달한 토곤은 군을 둘로 나누었고 그 중 한 갈래는 정붕비와 봇다깝답니(孛多急搭耳)가 1만명의 한인 군대로서 빈빈(永平)에서 치랑(枝陵)으로 나아갔고 또 하나는 록빈(祿平)에서 손동(山洞)으로 나아갔다. 이들 군대는 각각 2,500명의 병사로 무기와 식량 등을 호송하였다. 한편, 운남 일대에서는 아이로, 아타이(阿太), 망쿠다이 등이 이끄는 군대가 총사령관 토곤의 군대보다 훨씬 먼저 다이 비엣 국경으로 진입했고 12월 11일에 박학(白鶴) 일대에 도착했으며 같은 시각, 우마르와 반섭이 이끄는 해군은 함처우(钦州)에서 출발해 다이 비엣의 동북쪽 해안으로 이동했으며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12월 17일 전투선과 수송선을 분리한 뒤 전투선들은 반닌(萬寜) 하구로 이동, 강을 따라 반끼엡(萬劫)으로 향했다. 원나라 군이 다이 비엣에 진입하자마자 곧바로 쩐의 군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아이로가 이끄는 군대는 뚜옌꽝(宣光)에 주둔 중이던 쩐 냣두앗이 이끄는 4만 명의 쩐 군사를 상대로 박학에서 싸워 승리했으며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쩐군의 배 몇 대를 탈취한 뒤 그대로 공격, 장수인 레 따익(黎 石)과 하안(河 瑛)을 죽여버렸다. 아이로 등이 승전하는 동안 토곤의 군대는 국경의 강을 건너고 있었고 정붕비가 이끄는 한인 군대는 낭강과 투강 방향으로 이동하며 쩐의 군사들과 무려 17번의 교전에서 승리하며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던) 함사(陷砂), 뜨죽(徐竹) 기지를 점령했고 연이어 푸산(浮山)의 쩐군 기지를 공격했다. 쩐군은 숲이 우거진 것을 이용해 숨었다가 기습하는 방법과 밀림에 서식하는 독사를 여기저기 풀어놔 물게 하는 방식으로 원나라 군에 피해를 주었으나 주춤하던 정붕비의 부대에 원나라의 증원군이 추가되자 결국은 퇴각했다. 아이로와 정붕비가 쩐군과 좌충우돌 하는 사이, 토곤의 군대는 다음 이동 예상 지점이던 깔리(可里)까지 별 무리 없이 이동했으며 토곤은 쩐군의 근거지인 반끼엡과 가깝고 방어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찌린(至靈)과 파라이(普徠), 두 산을 점령해 단단한 기지를 세우고자 했다. 1288년 한인으로 구성된 군대는 마오라(毛羅) 운하에 도착해 주둔했다. 하지만 탄응애(乂城)를 공격하던 중 쩐의 군대가 반격을 가하게 되고 적군이 성내 주둔하면서 저항한다는 것을 안 정붕비의 군대는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토곤과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우마르가 이끄는 해군은 꾸앙옌(廣安)으로 진격했고 다모(多某)에서 쩐의 장군인 쩐 지아(陳 加)와 교전을 벌였다. 쩐 지아는 원나라 수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적의 함선 일부를 불태우거나 빼앗는 등의 공을 세웠으나 쩐 지아 측 병사들도 수백 명이 죽어나갔기에 결국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다이 비엣으로 들어갈수록 소비되는 식량은 늘어만 갔고 결국 보급이 반강제로 중단되는 일이 벌어지자 토곤은 장수들에게 다이 비엣의 마을들을 습격해 식량을 빼앗으라고 지시했다. 쩐군은 이런 원나라의 만행에 치를 떨었지만 어차피 털어 갈 것도 없었을 뿐더러 군대를 보존하기 위해 결국 음력 12월 초, 낭강 일대의 모든 기지를 버린 채 반끼엡으로 철군했으며 쩐 지아 역시 해상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반섭이 이끄는 해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바익당 강(白藤江)을 건너 박장(北江)으로 올라갔다. 쩐 꾸옥뚜안은 이를 막기 위해 박장에 함대를 배치하긴 했지만 원나라 수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288년 1월 초, 토곤과 정붕비의 부대가 합쳐졌는데 두 강을 지나며 17번의 전투와 푸산의 방어선을 뚫고 온 정붕비와는 달리 토곤은 큰 전투 없이 약한 저항군만을 만나며 꽤 순조롭게 내려온 상태였다. 원나라 군은 곧바로 반끼엡으로 진격했으나 그 곳에 쩐군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수도 탕롱으로 후퇴한 직후였다. 토곤은 점거한 반끼엡을 수뇌부로 삼고 그 곳에 2만 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킨 뒤, 계획대로 찌린과 파라이에 목책 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곧장 원나라 군은 토곤이 이끄는 부대와 쩐 냣두앗을 격파한 아이로, 그리고 우마르가 이끄는 해군으로 각각 수도 탕롱을 향해 나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